화, 01/23/2018 - 22:58

블로그 포스트

훈련받은 양심과 길들여진 양심

여증으로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어린 나이에 시작하면 할수록 워치타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후에도 꽤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워치타워가 주지시켜온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은 각자의 삶 구석 구석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여타 종교 조직과 다르게 왜 유독 여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종교적인 삶이 개개인의 삶 전체를 좌지우지하게 만들어 왔을까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워치타워가 여증 개개인들의 삶을 지배하기 위해 [훈련받은 양심]이라는 도그마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워치타워는 독특한 사고 체계를 만들면서 유독 자신들 만의 고유의 언어를 많이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 중에 ‘훈련받은 양심’ 이라는 표현과 기존 기독교 조직 체계와는 구별되는 듯 보이는 봉사자들의 직책 ‘전시간 봉사자’ 등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은 ‘훈련받은 양심’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워치타워는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양심을 꽤 심도있게 다루며 그리고 또 주기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워치타워는 여증 개개인들에게 자신들의 양심을 끊임없이 잘 훈련하도록 권합니다. 선한 양심을 유지하라고도 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훈련받지 않는다면 약한 양심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워치타워는 양심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양심이란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에 대해 판단하거나 재판하고,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양심의 기능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증언[합니다].”—로 9:1.
 
양심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양심을 사람의 일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양심은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인 인식 혹은 감각으로서 자신을 변명하기도 하고 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양심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재판한다. 양심은 또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 그리고 연구와 경험을 통해 사람의 정신에 심어진 확신과 규범에 의해서 훈련될 수 있다. 양심은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하여, 현재 취하고 있거나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행로와 비교한다. 그런 다음 규범과 행로가 충돌하게 되면, 양심에  “낙인이 찍혀” 있지 않는 한, 즉 양심의 경고를 계속 무시하여 양심이 무감각해져 있지 않는 한, 양심은 경고를 발한다.  양심은 그 사람 자신의 선하거나 악한 행위에 따라 기쁨을 느끼게도 하고 고통을 느끼게도 한다는 의미에서 도덕 안전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통찰책 제 2권 양심)
 
 이렇게 정의하고서 자신들이 정의한 방향으로 성경을 인용하여 지속적으로 세뇌시키면서 양심을 훈련시킨다고 인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증 대부분은 자신이 언제나 훈련받은 양심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하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양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양심에 대한 백과 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심은 대개 문화나 교육에 의해 주입되며, 일반적으로 어떤 행동의 도덕적 특성에 관해 직관적으로 권위있는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적으로 볼 때 거의 모든 문화는 양심의 존재를 인정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양심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양심의 인도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몇몇 신앙에서 양심은 신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행동지침으로 여겨진다. 힌두교 신자들은 양심을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으로 생각한다. 서구 종교집단 중에서 프렌드회(퀘이커교도)는 양심이 신의 '내적인 빛'을 이해하고 행동을 통해 그에 반응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종교적 맥락 이외에도 철학자·사회과학자·심리학자들은 개인적 측면과 보편적 측면에서 양심을 이해하려 했다. 양심을 옳고 그름에 대한 지각을 결정하는 타고난 직관력이라고 보는 견해를 직관주의라 부른다. 양심을 미래 행위를 유발하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누적된 주관적 추론이라고 보는 견해는 경험주의이다. 한편 행동주의 학자들은 양심을 특정 사회적 자극에 대한 일련의 학습된 반응으로 본다.
 
20세기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초자아를 주장하면서 양심에 관해 설명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초자아는 성격의 주요요소로서 아동이 부모의 인정과 처벌을 통해 도덕적 가치를 결합시킴에 따라 형성된다. 그결과 내면화된 일련의 금지·비난·억제는 양심으로 알려진 초자아의 일부분이다.
 
양심을 직관주의로 보거나, 경험주의로 보거나 행동주의로 보건 그 어떤 정의로든 기본적인 양심의 역할은 어떤 행위에 대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 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워치타워는 여증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과 같이 포항 지진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모금이나 불우이웃 돕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또는 적십자 구조 활동 등에는 공식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도 오로지 생명 구조 사업이 가장 큰 구호 활동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게끔 만들어 여증 개개인의 양심은 그닥 별 다른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양심적 병역 거부라고 당당히 법적 대응까지 하면서 실상은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워치타워가 정해 놓은 훈련받은 양심을 따라 가도록 철저한 지침까지 제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더 나아가 워치타워가 만들어 놓은 양심적 병역 거부 지침에 반하는 어떤 행동을 한다면 ‘이탈’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가족과 친지로 부터 철저한 왕따를 당하게 만드는 행위가 당연하다고 느끼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외에도 여러 경우들은 곰곰히 고려해 보신다면 여증들은 성경에 의해 훈련받은 양심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워치타워에 의해 길들여진 양심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워치타워의 가르침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에는 그들과 같이 우리 사회 주변에 여러 종교 단체들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다양한 자선 단체 활동이나 개인 활동을 보면서도 그리 마음 속 깊이 양심의 고통을 받지는 않았었습니다. 물론 일부 소수의 여증들은 개인적으로 불우 이웃을 돕는 선행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제 부친의 장례식에서 비로소 저는 조문을 온 몇몇 분들을 통해 부친께서 개인적으로 소년소녀 가장의 학자금을 도와주셨고, 지속적으로 양으로 음으로 그들을 보살피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나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또 돌아가신 다음에 부친께서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워치타워는 여증 개개인의 삶을 지배하기 위해 양심을 자신들이 고안한 방향대로 훈련 아니 길들여 왔습니다. 훈련은 “재주나 기예 따위를 배우거나 익히기 위해 되풀이하여 연습하는” 것이지만 이에 반하여 길들이는 것은 “부리기 좋게 가르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워치타워가 말하는 훈련받은 양심은 사실 워치타워가 부리기 좋게 가르친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여증으로 살아오면서 내가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그 많은 일들 중 어떤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양심에 근거한 행동이었는가를 말입니다.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어 분석을 해 보면 볼수록 예전의 나의 훈련받은 양심은 결국 워치타워가 만들어 놓은 도그마에 길들여진 양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