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04/19/2024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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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한국 지부감독자 도널드 스틸 형제에 대한 회상

 
무상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도널드 L. 스틸 !!
한국 여호와의 증인 초창기 인물들 이라면 스틸형제에 대한 여러 추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틸형제는 1920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었지만 종교적 이유때문에 이혼한 홀어머니 밑에서 장성하고 독립하였다.
 
스틸형제 독립 후에 적은무리이자 콜포처였던 어머니는 길르앗 학교를 나와서 푸에토리코 선교사로 살다 일생을 마감하였다. 스틸형제는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던 아버지로 부터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청년기를 보냈는데... (결혼식때만 조금 경제적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10대 후반에 이웃 고등학교에 다니던 1년 연상의 카톨릭 신자인 얼린(Earlene)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 1939년 이른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다.
 
신혼 여행을 다녀 온 첫 주말에 스틸형제는 아내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 주섬 주섬 가방을 꾸려서 집을 나서게 되었는데 아내인 얼린이 어디가냐고 묻는 말에 어렵사리 자신의 종교적 신분을 처음 밝히고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간다고 실토하게 되었는데.. 아내인 얼린은 "당신이 가는 곳이면 나도 가야하지 않겠냐"고 말하며 집회에 따라 나섰고, 그것이 카톨릭교인 이었던 얼린의 평생 증인 생활의 시작이 되었다. 얼린은 종교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남편때문에,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시간 봉사 생활을 하였고 선교봉사 내내, 남편은 선교봉사를 하더라도 자신은 아이를 갖고 평범한 여인으로서 생활을 하고 싶어 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스틸부부는 20대 중반을 막 지난 1946년에 길르앗성서학교에 초대받아서 선교인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첫 임명지로 일본을 지명받고 교육 기간 내내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임명지로 떠나기 직전에 막 독립한 국가였던 한국으로 임명지가 변경되었고 대신 일본으로는 같은 기수의 로이드 베리형제(후에 워치타워 부협회장을 지냈던)가 가게 되었다.
 
임명지 변경 등 여러 사유때문에 스틸부부는 뒤늦게 1949년 한국에 부임하게 된다.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마중나온 한국의 원로 증인 노아무개, 이아무개형제 등의 환영을 받으며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스틸부부는 한국에서의 첫날 밤을 서울 시내의 어느 여관에서 지내게 된다. 여관 방에서 아침에 눈을 뜬 스틸 부부는 생전 맡아보지 못한 요상한 냄새를 맡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창문 밖에 세워져 있던 똥구루마에서 풍기던 냄새였고, 그 첫날의 기억은 그 후 오랫동안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6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집집마다 똥을 푸러 다니던 똥구루마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틸형제는 지적이거나 섬세하지 않았으며, 전형적인 미국 남부 사나이의 터프한 스타일이있고 다혈질의 성격으로 쉽게 불같은 화를 내고 길길이 뛰는 스타일 이었지만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틸형제에게 많이 혼 난 사람이라도 스틸형제를 싫어하는 밷엘 출신 형제는 없었다. 단지 60년대 후반기에 번역부에서 일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김광*형제의 경우는 예외였다. 김광*형제는 서울대 출신의 수재였고 당시에 주로 파수대 번역을 했는데, 거의 사전을 보지않고 직독 직역을 할 만큼 뛰어난 어학 실력을 가졌었다.  김광*형제의 아버지는 419혁명을 축발시킨 원인이 되었던 마산 김주열 사망사건을 드러내었던 당시 당담 검사로 유명한 분이었고, 인천지검장을 마지막으로 관계를 떠난 후 증인이 되신분이었다.
 
김광*형제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했으며 심한 결벽증도 있었다. 당시 서대문 지부사무실의 1967년 증축 건물은 일본 지부의 지원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고 때문에 일본에서 지원한 자재들이 많이 사용되어 지어졌는데, 특히 화장실의 변기가 그러하였다. 3층 숙소에는 3개의 좌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화장실의 변기는 일제 좌변기였고 세번째 맨 안쪽에 있던 변기는 좌변기가 아닌 쪼그려 앉는 재래식 변기 스타일 이었다. 자연스럽게 첫번째 변기는 스틸부부를 비롯한 미국 선교인들이 사용하였고, 두번째 변기는 한국인 지부위원급 인물들이, 그리고 맨 안쪽의 변기는 일반 한국 형제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는데... 하루는 스틸형제가 화장실을 사용하려다가 첫번째 화장실에서 나오는 김광*형제를 마주치게 되었다. 스틸형제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왜 한국사람이 이곳을 사용하는냐고 야단을 쳤고, 자존심 강한 김광*형제는 그 상황을 참지 못하고, 그날 그길로 벧엘을 떠나게 되었고, 벧엘을 떠난 것만 아니라 증인조직을 떠나 버렸고, 김광*형제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인 김종*형제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조직을 떠나 버렸고 그들 모두는 그 직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렸다.  그것이 아마 1970년경 일 인것 같다.
 
그 여러 해 뒤, 80년대 중반에 한국 신문 한컷 뉴스로 김광*씨의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뉴욕 검찰청의 첫 한국인 출신 검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즈음 미국 맨하턴 거리를 걷던 한국인 형제가 길에서 우연히 그 아버지인 김종*형제를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는데 그 분은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인사를 외면하고 지나쳐 버리시드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70년 당시는 75년 바람이 한창 불 때인데, 과감히 조직을 뒤로하고 세상으로 나가 버리신 그 분들이 이미 당시에 상당한 선견지명을 가지셨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여하튼 이 일은 스틸형제에게는 뼈아픈 사건이었고, 그 일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는 스틸형제의 인종차별성 공격은 많이 줄어들었다.
 
스틸자매는 한국에 온 이후로 선교 봉사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크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도 인상이었지만 종교심 자체가 약한 분이었다. 일본에서 625전쟁 피난 생활을 마치고 1953년 한국에 돌아 온 스틸 자매는 호별 방문을 마치고 시장 주변을 지나다가 앙꼬가 가득한 찐빵을 하나 사서 한 입 베어 물고는 기겁을 하고 뱉게 된다. 짙은 색의 앙꼬가 쵸코렛일 거라 생각하고 입에 넣었던 것인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맛을 보게 되었고 그 이상한 맛은 똥구루마의 추억에 더해져서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갖게되는 요인의 하나로 추가된다. 그 이후 스틸자매는 죽을 때까지 절대 찐빵을 먹는 일이 없었다.
 
스틸자매는 아주 드물게 호별 봉사를 나가는 일 외에는 거의 지부사무실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초기에는 지부사무실의 예약잡지 발송 등의 일을 돕는 일을 조금 하기는 하였지만, 평생 거의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으며, 건물 내에서만 지내다 보니까 뼈가 약해지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말년에는 기침만 해도 갈비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골밀도 저하의 문제가 있었다. 스틸자매는 오전부터 알콜을 마셨으며, 거의 매일 술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였다. 스틸형제 역시 알콜의존이 심했으며, 근무 시간 중에도 방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나오는 일이 흔했다. 두 분 다 알콜 중독이 심각한 상태였으며, 결국 스틸자매는 건강 악화로 비교적 젊은 나이인 66세에 생을 마감하셨으며 스틸형제도 73세인 1993년에 돌아가셔서 미국 월킬농장 한 구석에 묻히셨다.
 
남편에 대한 사랑때문에 원하지 않는 한국에서의 선교생활을 하시다 생을 마감하신 스틸자매! 조직에 대한 의리때문에 친한 벗이었던 길르앗학교 교수 던럽형제가 레이몬드형제와 함께 조직에서 쫒겨날 때, 던럽형제가 보낸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찢어 쓰레기 통에 던져버리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순진하셨던 스틸형제 !
 
두 분 다, 인간적으로는 많이 정이 갔던 분들이다. 속아서 한국에 오셨고, 조직의 약속을 믿고 생의 전부를 바치신 분들인데... 그분들이 많이 보고싶고, 속아서 산 그분들의 인생이 많이 불쌍해서... 가슴이 많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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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류비의 이미지

해밀톤 형제도 생각나네요.

해형님도 그리 한국을 좋아하셨던 것 같지는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 한국에 계셨던 세월에 비해 발음이... ㅠㅠ

지역대회 보통 마지막 부분에 해형님이 연설 하시는데, 지친 몸과 정신때문에 해형님께서 연설하실 때는 졸음을 극복하지 못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공감하실 분들 많으시리라 예상합니다 ^^)

언어와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대한민국에 오셔서 순수한 삶을 사셨던 외국인 형님들을 이렇게 기억해 드리는 것만이 해드릴 수 있는 전부가 되겠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류비의 이미지

미국에서 매우 유복하게 살아가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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